아스널 FC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소위 잘 나간다는 우수한 클럽 중 하나입니다. 아스널 FC는 단순한 축구 클럽을 넘어, 혁신적인 전술과 철학으로 잉글랜드 축구, 나아가 세계 축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명문 구단입니다. 특히, 각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전술 철학을 바탕으로 아스널의 경기 스타일을 구축하고, 수많은 영광의 순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아스널의 역대 감독들이 사용한 전술 철학을 심층 분석하고, 그 변화와 발전 과정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허버트 채프먼 (1925~1934): WM 포메이션
허버트 채프먼은 아스널을 넘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채프먼 이전의 잉글랜드 축구는 2-3-5 포메이션이 주류를 이루며, 공격수 5명을 전방에 배치하고 2명의 수비수가 상대 공격을 막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채프먼은 이러한 틀을 깨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WM 포메이션(3-2-2-3)이라는 혁신적인 전술을 도입했습니다. WM 포메이션은 기존의 2-3-5 포메이션에서 센터 하프가 뒤로 내려와 센터백이 되고, 인사이드 포워드 두 명이 뒤로 내려와 미드필더가 되는 형태입니다. 3명의 수비수는 대인 방어를 담당하고, 2명의 하프백은 수비 지원과 공격 가담을, 2명의 인사이드 포워드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 3명의 포워드는 득점을 담당하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채프먼의 WM 포메이션은 당시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수비수를 늘리고 미드필더를 강화하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채프먼의 전술은 아스널에 놀라운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안정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빠른 역습을 전개하는 채프먼의 아스널은 1930년대 잉글랜드 축구를 지배하며, 1930-31, 1932-33, 1933-34, 1934-35 (채프먼 사후) 시즌 리그 우승과 1930년 FA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채프먼의 WM 포메이션은 이후 전 세계 축구 전술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현대 축구 전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버티 미 (1966~1976): 철벽 수비와 효율적인 역습
버티 미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아스널을 이끌며, 허버트 채프먼 시대 이후 침체기에 빠져 있던 팀을 다시 한번 정상으로 이끌었습니다. 버티 미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에서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한 4-4-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철저한 수비 조직력과 효율적인 역습을 강조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버티 미의 아스널은 '실점하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두 줄 수비를 통해 상대 공격을 촘촘하게 막아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들은 강한 압박과 태클로 상대의 패스 길목을 차단하고, 측면 미드필더들은 빠른 발을 이용해 역습에 가담했습니다. 버티 미는 특히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집중력을 강조하며, 수비와 공격 모두에서 세트피스를 중요한 전술적 요소로 활용했습니다.
버티 미의 전술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매우 실리적이고 효율적이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아스널은 1970-71 시즌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동시에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아스널 역사상 최초의 더블이었으며, 버티 미의 전술적 역량을 입증하는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조지 그레이엄 (1986~1995): 철옹성
조지 그레이엄은 아스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비진을 구축한 감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4-4-2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토니 아담스, 스티브 볼드, 리 딕슨, 나이젤 윈터번으로 이어지는 '철의 포백'을 구축하여 아스널을 '수비의 팀'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레이엄의 아스널은 '1-0의 미학'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됩니다. 이는 득점은 많지 않더라도,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실점을 최소화하여 승리하는 그레이엄의 전술 철학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레이엄은 수비수들 간의 간격을 좁히고,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압박하는 지역 방어를 강조했습니다. 특히, 당시 아스널의 '유명한 오프사이드 트랩'은 상대 공격수들을 번번이 좌절시키며, 아스널 수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레이엄의 전술은 공격적인 화려함은 부족했지만, 끈끈한 조직력과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꾸준히 승점을 쌓아나가는 실리적인 축구였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아스널은 1988-89, 1990-91 시즌 리그 우승, 1993년 FA컵, 1994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등 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아르센 벵거 (1996~2018): 아름다운 축구
아르센 벵거는 아스널의 전술 철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감독입니다. 그는 부임 초기에는 4-4-2 포메이션을 사용했지만, 점차 미드필더를 다이아몬드 형태로 배치하는 변형된 4-4-2 포메이션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4-2-3-1, 4-3-3 포메이션 등 다양한 전술을 시도하며 아스널을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벵거는 '패스 앤 무브' 철학을 바탕으로, 짧고 빠른 패스를 통해 경기를 풀어나가는 점유율 축구를 추구했습니다.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로베르 피레스 등 뛰어난 기술과 창의성을 가진 선수들을 중심으로, 유기적인 움직임과 화려한 개인기를 통해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공격 축구를 선보였습니다. 웽거는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포지션 변화와 창의적인 플레이를 장려하며, 공격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벵거의 아스널은 잉글랜드 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아스널은 1997-98, 2001-02, 2003-04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특히 2003-04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패 우승(Invincibles)'을 달성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웽거는 아스널에서 22년 동안 3번의 리그 우승, 7번의 FA컵 우승 등 총 17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미켈 아르테타 (2019~현재): 현대적인 점유율 축구
미켈 아르테타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 밑에서 코치 경험을 쌓은 후, 2019년 아스널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현대적인 전술 철학을 팀에 이식하고 있습니다. 아르테타는 4-3-3 또는 4-2-3-1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하며, 짧은 패스와 중앙 빌드업을 통해 점유율을 높이는 포지셔널 플레이를 추구합니다.
포지셔널 플레이는 선수들이 정해진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공의 위치와 상대 선수들의 위치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공간을 점유하고 활용하는 전술입니다. 아르테타는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고,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여 패스 선택지를 늘리도록 요구합니다. 또한, 전방 압박을 통해 상대의 빌드업을 방해하고, 공을 빼앗은 후에는 빠른 역습으로 전환하여 득점을 노리는 전술을 구사합니다. 그는 풀백과 윙어의 유기적인 움직임, 미드필더의 창의적인 패스를 통해 상대를 공략합니다.
아르테타의 아스널은 아직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점차 젊고 유능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건하며, 다시 한번 프리미어리그 정상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물로 아르테타는 2020년 FA컵 우승, 2023년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차지하며, 아스널 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지난 2023-24 시즌에는 아쉽게 우승을 놓쳤지만 이번 2024-25 시즌 2월 현재 리버풀에 바짝 추격하며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며,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향한 도전을 하는 중입니다.
아스널의 박주영, 좌절된 꿈
대한민국 선수와 아스널 사이의 연관성을 떠올려 본다면, 박주영이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몸담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비록 짧고 굵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스널 이적 과정과 배경, 그리고 실패 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아스널 입단 전의 박주영은 2005년 FC 서울에서 프로 데뷔하여 K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골 결정력과 영리한 움직임, 그리고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2008년에는 프랑스 리그앙 AS 모나코로 이적하여 유럽 무대에 진출했고, 세 시즌 동안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2010-11 시즌에는 리그 12골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1년 여름, 박주영은 프랑스 릴 OSC로의 이적이 거의 확정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메디컬 테스트를 받기 위해 릴로 향하던 중,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으로부터 극적인 연락을 받고 런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당시 아스널은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미르 나스리 등 핵심 선수들이 이적하며 전력 보강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반 페르시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 때문에 벵거 감독은 다양한 공격 옵션을 제공할 수 있는 박주영을 긴급하게 영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박주영의 아스널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확고부동한 주전 공격수 로빈 반 페르시의 부상 회복이 빨랐고, 마루앙 샤마크, 제르비뉴 등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습니다. 박주영은 주로 리그컵이나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거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박주영의 부진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우선, 벵거 감독의 전술 스타일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벵거 감독은 빠르고 유기적인 패스 플레이를 선호했지만, 박주영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움직임과 개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한,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거친 몸싸움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박주영의 아스널 이적은 팀의 장기적인 계획에 의한 영입이라기보다는, 핵심 선수들의 이탈로 인한 급작스러운 결정이었다는 점이 그의 실패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벵거 감독은 박주영을 충분히 활용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박주영 역시 팀에 녹아들기 위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주영은 2014년 아스널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 알 샤밥으로 이적하며, 아스널에서의 아쉬운 도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아스널 시절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큰 기대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안타까운 실패로 끝난 비운의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아스널 전술 철학의 진화와 미래
아스널의 역대 감독들은 각자의 시대적 배경과 철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술을 선보였습니다. 허버트 채프먼의 혁신적인 WM 포메이션부터, 버티 미의 철벽 수비, 조지 그레이엄의 '1-0의 미학', 아르센 웽거의 아름다운 축구, 그리고 미켈 아르테타의 현대적인 포지셔널 플레이까지, 아스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르테타 감독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르테타 감독이 아스널의 전통적인 공격 축구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지, 결과를 곧 보여줄 것만 같은 아스널이기에 팬들에겐 밝은 미래가 기대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